적십자 행사

중국 서안시 홍십자 방문 기사 중협에서 펌

비단향기 2010. 4. 17. 14:38

 서안시(성)에서 화산까지 3박4일의 흔적

Date : 2010-04-16, Hit : 45

서안시(성)에서 화산까지 3박4일!~ 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협의회

 

설레는 마음과 부풀은 기대를 안고 인천공항을 떠난 대한항공 807기가 3시간의 침묵을 깨고 서안시 상공에서 착륙 준비를 한다.

 

대부분의 농지는 잘 정리 되어있고 절벽을 깍은 듯 험준한 고산지대의 농지는 계단식으로 자연의 모습에 더 가깝다.

 

아주 멀리 냇가 한줄기가 보이긴 하지만 물도 없고 사람도 안보이고 다니는 차량도 없었다.

 

대지에 가까이 닿을수록 간혹 지나는 차량과 정리된 농지사이로 드문드문 군락을 이룬 마을이 보인다.

 

내 느낌으로 딱히 표현하자면 어릴 때 보았던 각 성냥 통 들을 옹기종기 쌓아 놓은 느낌이다.

 

논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거의가 채소농사가 무성한 밭이고 가옥들을 대다수가 2~3층 우리나라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를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윤금영 회장의 착륙 인사는 우리가 선진지 통하여 견문을 넓히고 3박4일 동안에 무탈하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여행을 마치고 귀국 했을 때는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추억을 갖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삼엄한 분위기에서 이것저것 검열이 끝나고 대합실을 빠져나오니 우리 일행(경기지사협의회 24명의 봉사자)을 3박4일 동안 안전하게 인솔 해 줄 가이드 서일봉씨(교포3세로서 길림성:장촌 옛:심정)와 진영철씨 보조가이드가 반겨주었다.

 

버스는 찌들하고 아쉽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정을 담아야했다.

 

가이드는 이곳의 정확한 공항명은 ‘서안.함양 국제공항’ 이라고 전한다.

 

서안의 옛 이름은 장안성(우리나라 ‘도’ 중국은 ‘성’으로 표기)이고 함양은 진시황의 도읍지로 이태리 로마보다 고도의 역사를 지녔다고 했다.

 

당태종, 당현종, 주문왕 등 72개의 왕릉이 있는데 그중 함경제의 1개만 발굴했다.

 

70년대 초 발굴한 그 숫자가 10만개가 넘었고 2006년 첫선을 보였는데 남자, 여자, 내시 모두가 알몸이어서 왜일까? 연구 결과 그 옆에서 실크를 발견하였고 실크로드의 시작점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서안과 함양은 풍년지로 동서 400km의 관종평원(평야)이고 600km의 빼어난 절경의 진령산맥이 있어 이곳을 차지하려는 긴 역사 속에 숱한 전쟁이 민족성을 분열했나보다? 크게 정감이 없는 듯하다.

 

내륙지방의 인구가 860만 명 중국 13억 인구 중 서북부 지방에선 제일 크고 7대도시에 속한다고 했다.

 

처음 당도한곳이 실크로드의 발상지에 대경로에 도착하여 여행을 확인하는 첫 번째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서안성에서부터 실크문화의 경로가 유라시아를 건너 이스탄불까지 1만2천km나 된다니 상상의 여지가 깊다.

 

우리 일행은 지금부터 1350년 전 당나라의 고승 삼장법사가 지었다는 대안탑을 방문했다.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경전이나 불상 등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높이는 7층(64m)으로 처음에는 5층이었지만, 중간에 10층까지 증축된 후, 현재의 7층만 남았고 이름의 유래는 보살의 화신으로 기러기의 무리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죽은 기러기 한 마리를 탑을 지어 매장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서유기의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을 들추고 전설이 아니냐는 둥 의문을 논하면서 연실 통감했다.

 

숱한 세월의 지각변동으로 대안탑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는데 이러다가 아시아에서도 피사의 탑이 나올까? 점지도 해보았다.

 

우리 일행은 일정표대로 중국의 전통 발마지로 피로를 풀고 간단한 가무와 전통 식사를 마치고 양광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서안의 첫 밤을 맞았다.

 

이튿날 아침이다.

 

호텔 창을 열고 출근길이 분주한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10차선 대형도로에는 신호등도 없고 버스와 택시는 종횡무진하고 자전거와 보행자는 서커스를 하고 있다.

 

그래도 제각기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다닌다.

 

다음날 많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따라 화산(꽃을 닮은산)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서안은 한 해 동안 강우량이 600ml 가 안 되고 비오는 날이 기분 좋은날 행운의 날로 점지한다고 했다.

 

출발하면서 질척질척 비가오더니 이내 멎었다.

 

화산 입구에 도착하니 서일봉 가이드는 ‘걷고 있을 땐 경치를 보지 말고 쉬고 있을 때 산을 보라’ ‘사진을 찍을 땐 조금 더 뒤로’ 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

 

여차! 잘못하면 화산길이 황천길이 된다고 했다.

 

으스스 했지만 꼭 필요한 말이다.

 

우리는 미니셔틀 버스를 타고서 케이블이 있는 곳 까지 갔다.

 

북봉인 운대봉 까지 1600고지를 케이블카는 수직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꺼억 거리고 중간 철탑이 있는 케이블에서는 덜커덩! 꺼억! 아마도 몇몇은 숨도 막히고 오금도 저리는 심경을 억누르느라 ‘혼수상태 였을껄! 사실 나 역시 별 수 없었는데’

비가 내린 뒤 끝이라 굽이굽이 아름다운 비경은 구경하지 못했지만 참 잘 왔다는 생각은 모두의 공감이다.

 

오후3시까지 자유시간인데 집행부에선 꼭 짝쿵과 함께하기를 요구하고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경 속에서 사진도 찍고 흔적도 남겼다.

 

차량이동으로 왕복6시간을 소비하는 시간이 아깝기는 했어도 화산의 기억과 여운은 그냥 화산이 환상이다.

 

석식은 별다른 맛이다.

 

중국 전통음식 우육과 양육의 샤브샤브였다.

 

다른 일행들은 잘 몰라도 나는 모든 게 다 맛있었던 기억이다.

 

서안시 성남로에 있는 양광우도대극원(원형극장)에서 ‘대당락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애를 관람했다.

 

당현종과 양귀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다.

 

당현종은 4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8번째 아들의 첩이 양귀비였는데 당시 양귀비는 27세 당현종은 56세의 나이로 현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륜이지,,, 시아버지 당현종을 울린 경국지색 양귀비가 얼마나 예뻤을까? (로맨스가 맞나?)

일행은 그저 가이드의 해석에 귀동냥만 할뿐 한막식 내릴 때마다 극장이 떠나가는 박수의 진동만 찌렁하다.

 

의사전달은 잘 안되지만 공연의 분위기와 감명의 느낌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재미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호텔(숙소)에 당도하였다.

 

경기지사협의회 1/4분기 운영위원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내일은 귀국전야이기 때문에 회의가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이다.

 

이철순 총무국장은 회의를 서장을 알리고 윤금영 회장으로부터 인사말을 유도한다.

 

『윤금영 회장은 멀리 중국 서안성에 와서 협의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회의장소가 다소 불편하고 협소하지만 임원들의 이해를 구하는 인사말을 남겼다.』

 

전차회의록, 재무보고, 2010년도 예산안, 등을 다루었다.

 

심상익 직전회장은 중협 총회 시처럼 금액명시와 분기별, 반기별, 년말정산, 등 항상 사전준비를 해 나가야 회의가 발전이 있다는 개선점을 요구했다.

 

문현길 부회장은 2/4분기 개최 전에 점검이 필요하고 체계적이고 원만한 회의가 진행되기를 요구했다.

 

1원1m걷기대회와 중요성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으로 회의 시간이 지연 되었지만 역시 슬기로운 임원, 지구협의회장들의 가결이 있어 원만하게 회의를 마쳤다.

 

각 지구협의회장의 발의와 원안 사항은 모두 열거 할 수는 없지만 봉사단체의 위상의 자립도가 요구되는 요청들이다.

 

서안의 두 번째 밤은 이슥히 깊어가고 여행의 끝과 내일의 일정을 위하여 전원 숙면을 청했다.

 

삼 일째 맞는 아침이다.

 

창밖을 주시하니 엄청 많은 량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국 서안시 홍십자회(부회장 최 금수)를 방문하는 날이다.

 

홍십자회는 외국과 교류가 없는듯하고 1911년에 설립하여 명년이 100주년이라고 했다.

 

중국문화의 대혁명으로 주춤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 100주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홍십자회는 어느 곳이든 시장이 당연직 회장이고 공식적인 행사는 부회장이 다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최금수 부회장은 2008년도에는 사천 대지진 발생 시 한국 서경(kbs방송국)과 서안 방송국이 결연을 맺고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국제적인 조직으로 교류를 원했다.

 

이외에도 가뭄에 시달리는 곳 도움이 필요한 곳을 계획하고 찾는 일에 주력을 한다고 전했다.

 

중국 홍십자회는 서안시 860만 인구에 약 5000명의 회원이 있다고 했고 대다수가 공무원이라고 했다.

 

아울러 아무런 대가없이 봉사하는 한국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윤금영 회장은 공동 대표자 회견에서 먼저 경기도 가족을 대신하여 인사를 올린다.

 

우리 경기지사협의회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사랑을 전하는데 뜨거운 자부심을 갖고 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다.

 

각 재해 재난 시 도민들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한 세상 만들기에 적십자 봉사원들이 손을 잡고 다가서야 한다.

 

진정한 적십자 이도 구명에 중화민국 서안시 홍십자회와 교류를 통하여 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을 하는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피력했다.

 

바쁘신 와중에도 환대하게 배려해주신 부회장과 임직원 여러분께 심심한 인사를 드린다.

 

한국은 1903년 1월8일에 창립 1905년 10월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꾸준히 발전해 오면서 이산가족 찾기, 재회, 국제적 도움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봉사활동은 재해 시, 이재민에게 재난구호를 도우며 취약계층에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세탁봉사, 3500여명의 어버이 결연세대와 봉사원1:1 나눔과 구호미 4만2천포 전달, 가사 돕기, 말벗, 현금 및 부식전달 향후 어버이 결연세대 돕기 강화에 더 확대해 나갈 방침아라고 전했다.

 

장애시설과 노인시설 직접 방문을 실시하고 다문화가정 300세대와 결연하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있으며 친정어머니 되어주기 고국방문 봉사활동을 전개 하고 있다.

 

봉사원은 중앙협의회와 14개 시.도지사와 7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기도는 31개 시.군구에 32개 협의회와 420개 단위봉사회에 1만2천명의 봉사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윤금영 회장은 협의회 16명 임원구성 요소와 참석한 임원과 협의회장을 일일이 소개를 하면서 시간 관계상 일부만 보고함을 공지했다.

 

우리는 심상익 직전회장의 질문사항으로 홍십자회원의 자격과 구성원이 공무원과 5000명 회원이 주로 공무원이며 일한 만큼의 대가성 보수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달리며 임동으로 간다.

 

임강과 임동은 4대성(동대문: 곡물, 음식, 양식이 드나들던 곳. 남대문: 황제 순시. 북문: 외국 사신이 드나들던 곳. 서문: 평민이 드나들던 곳)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일컫는데 1시간을 달려 임동의 화청지로 왔다.

 

화청지는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들의 온천지가 되었다고 하는데 화청궁의 온천지로 목욕탕만 즐비했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로맨스를 즐기던 곳이라 화려했다.

 

앞서 가이드로부터 당나라의 미인들의 생김새를 들었듯이 양귀비의 옥돌로 만든 동상을 보니 실망이다.

 

수려한 몸매도 아니고 절색의 미인도 아니다.

 

그냥 당나라의 미인일 뿐 후세들은 그를 아편인 양귀비에 비유했으니 아마도 마력이 있었던 거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양귀비의 무덤은 서방의 극락세계를 간다하여 서방에 있는데 지금의 양귀비 무덤은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을마다 지나가는 박색인 처녀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을 떠다가 세수하면 양귀비처럼 예뻐진다고 하였다는 전설인지 속설인지 지금도 전해내려 온다고 했다.

 

또 출출하고 허기가지니 먹을 때가 되었다.

 

서안사람들은 3끼니 주식 중 1기는 꼭 국수나 만두를 먹는다고 한다.

 

벼농사(알랑미)를 하는 농민도 있지만 모두가 주 농사가 밀농사이기 때문에 낙타 눈썹처럼 가는 국수부터 허리띠만큼 넓은 국수가 있어서 한 올, 두 올씩 주문한다고 한다.

 

우리는 북경이나 상해에서 없다는 교자연으로 점심을 했다.

 

서태후가 북경 자금성이 함락되고 서안성으로 후퇴하여 머무는 동안 108가지의 만두를 먹었는데 요즘은 10가지 만두가 10개씩만 나온다고 다툼 없이 잘 나누어 드시라는 주문이다.

 

맛은 각자 나름대로 미각의 차이지만 나는 그것도 맛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한국교민이 운영한다는 라텍스 제품장을 방문하여 천연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원액으로 만들어진다는 라텍스 용품인 베개며 침대시트 라텍스통부인 등 쇼핑을 했다.

 

아울러 실크의 원산인 서안성 중국 최대의 실크공장이 있는 곳을 방문하여 누에에서 실크까지의 과정들을 체험하고 각자의 선물들을 쇼핑을 마쳤다.

 

드디어 내가 가장 궁금하고 처음 보는 실물 병마용 갱으로 갔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고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과 환상이라 꼭 보고 싶었던 곳이다.

 

병마용은 흙으로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 되였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과 100여개가 넘는 전차 40 여필의 말과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 병마용 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졌다.

 

1호 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 되여 있고 2호 갱은 보병과 기병 마차병과 궁수병의 혼합진이고 3호 갱은 장군들의 지휘부이다.

 

진시황 사후 2100년만인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고 이를 후세들이 볼 수 있고 연구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병용보다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었고 병마용은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었고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고 전한다.

 

현대과학의 힘으로 당시 상황을 제대로 복원이 가능하지만 중국의 역사학자와 과학자들은 당시의 색상까지도 재현할 것이라 장담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은근히 여행경비의 본전을 챙겼다는 느낌이다.

 

병마용 갱에서 진시황 릉 으로 가는 도중에는 도로의 양쪽으로 어마어마한 석류과수원들이 환영하고 있었다.

 

서안의 시화가 석류꽃이고 10월경이면 만개하여 그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룬다고 했다.

 

진시황 릉에 도착했다.

 

70만 군사가 동원하여 37년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이기 보다는 동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내부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지하속의 아방궁 일 것으로 추측할 뿐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중간의 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장엄한 중국의 역사를 감상했다.

 

서안의 마지막 날 저녁식사는 한식당으로 향하는 일이다.

 

먹는 소리가 제일 좋은지 그간 줄곧 기름진 음식만 먹다가 맵고 짜고 생각만 해도 군침이 입안에 가득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리말로 ‘한송학’ 식당이라고 씌어져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반가웠다.

 

시장이 반찬인지 맛있어 반찬인지 허겁지겁 이것저것 막 퍼 먹는 한식뷔페가 너무 풍만하게 해 준다.

 

윤금영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이제 아침이 밝으면 처음 출발했던 인천공항으로 향하게 된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희노애락이 있는 법 만약 조금이라도 서운한 일이 있었다면 공항에서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다 떨쳐버리시길 바란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도 아쉬운 일도 많지만 여행을 통해 우정은 하나라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동안에 작은 일 하나는 있었으나 회장으로서 불찰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관용해 주기를 바라며 임원들의 협조와 단합에 순조롭고 보람찬 여행 이였다고 표현하고 건배를 제의했다.』

 

모처럼 행복한 저녁식사 마치고 서안의 마지막 밤은 단체별 자유 시간을 가졌다.

 

나는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서안의 아쉬움을 발 마사지를 한 번 더 받기로 결

 

정하고 팀을 구성해 피로를 확 풀었다.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다.

 

날씨는 그런대로 양호하고 기분도 상쾌하고 컨디션도 최고다.

 

우리는 여장을 주섬주섬 챙기고 호텔을 나섰다.

 

마지막 경유지 비림박물관이다.

 

비림은 비석이 숲을 이룬다하여 그 명이 비림이고 왕희지, 안진경등 유명한 서예가들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비석도 이곳에 있었다.

 

‘자식은 부모에 효도하고 신하는 나라에 충성하라’ 문구와 석서무후의 무자비가 지금도 연구대상으로 전해오고 114개의 비석 양면 228면에 65만자가 수록 되여 있다는 돌에 새겨진 조각의 신비함은 혀를 두른다.

 

우리나라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 생각나 잠시 역사의 중요성을 비교해 보았다.

 

이제 일행은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북한 농산물과 약재를 판매하는 곳을 들러서 각자가 푸짐하게 장만하고 떠나왔다.

 

중국여행! 아쉽지만 미련이 없다.

 

가이드는 중국 최초의 술을 만들었던 두강이 피로서(선비의 피, 장군의 피, 거지의 피,) 두강주를 만들게 된 역사를 소개하고 우리 일행에게 두강주 2병을 선물하면서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민족의 아쉬움을 나눈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중국은 13억 명의 인구와 광활한 땅을 소유하고 있다.

 

문화와 역사도 세계가 알아준다.

 

아울러 무궁무진한 미래를 갖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향후 30년 안에는 중국이 세계를 정복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내가 본 중국은 국민성이 절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이다.

 

중국에서 내가 당한 망신 때문에가 아니다.

 

그들의 눈속임과 저질적인 상술이 그들의 몸에 배여 있는 한 중국의 국가성장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나는 중국 여행이 이제 겨우 2번째 이다.

 

공교롭게 두 번의 여행이 적십자와 관련 홍십자회를 방문이다.

 

2000년 6월 적십자 회원이 아닌 자격으로 안도장학회를 길림성과 안도현 제1중학교를 6박7일 동안 방문한 적이 있다.

 

이번엔 적십자 회원이 되어 3박4일 동안 경험을 해 보았지만 2번의 공통점은 국민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중국은 1956년부터 약자를 사용해 현재 50세 미만은 역사학을 공부해도 잘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훈민정음은 천년만년 자자손손 헤아려 간다.

 

우선 중국은 상형문자를 통한 자국의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데 약하고 경제성장의 기초인 상법(상술)이 조잡스럽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찰제와 속지 않고 살 수 있는 문화가 기강이 서 있어야한다.

 

윤금영 회장이 이끈 24명의 봉사인 들은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또 다른 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행복한 보금자리로 떠났다.

 

모두들 다음에 만날 때 까지 건강하고 생업에 열중하고 특히 멋지고 보람된 봉사를 펼쳐 가시길 기원한다.